[ad_1]
“농부들은/ 너무 많은 일을 했다/ 나라에서는 이를 어여삐 여겨/ 모든 일손을 놓고/ 쉬게 했다/ 몇 푼씩 보상비를 나눠주고/ 물걱정 농사걱정을 깡그리/ 잊게 했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쓰레기를 줍든/ 영세민 아파트에서/ 눈꼽낀 눈으로 멀뚱하게/ 고향을 생각하든/ 알 바 아니었다/ 다만, 먹고 자고 빈둥거리는/ 갈곳없는 긴 형벌을/ 관리들은 가가호호 선심 베풀며/ 나누어 주었다/ 누가 빠질세라 골고루” (고영조 <형벌> 중)
경남 창원은 농민들의 땅이었다. 1973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기계공업기지 예정지로 창원을 시찰하고 창원종합기계공업기지 건설계획을 확정하면서 ‘토박이’들은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보금자리와 농토를 잃었다. 창원 지역의 산업단지(산단) 조성은 마산·창원의 환경과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지도자의 ‘현명한’ 결단으로 이룬 ‘최초의 계획도시’라는 이름으로 역사가 됐고 경제발전 ‘신화’로 포장됐다.
하지만 30~40여개의 농촌마을이던 창원(당시 창원군)에서 살던 원주민들은 지도자의 결단으로 삶의 터전을 잃었고, 삶의 터전조차 없는 이들은 역사에 등장하지 못한다. 창원으로 이주해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신화’에 묻혔다. 누군가의 ‘신화’가 또 다른 누군가의 ‘형벌’일 때 보통 역사는 강자의 이야기를 채택한다. 지역신문 기자들이 창원의 잊힌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경남도민일보의 이창우·강찬구 두 기자는 책 <창원 공단의 기억>에서 “중공업 중심지 창원기계공업공단은 한국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그 과정은 산업사·도시사 차원에서 긍정적인 면만 다뤄졌다”며 “하지만 그 이면에서 원주민들이 받았던 고통이나 공장 구석구석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잊혔다”고 썼다. 창원의 ‘사람’ 이야기를 다루겠다는 뜻이다. 책의 부제는 “뿌리뽑힌 사람들, 뿌리내린 사람들”이다.
헐값에 뿌리뽑힌 사람들
지역신문의 필요성이나 역할을 말할 때 흔히 권력감시, 특히 지방의회의 미약한 힘으로 견제가 벅찬 지자체 등 행정권력에 대한 견제를 그 이유로 든다. 신문기사가 역사의 초고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역신문은 권력의 관점이 아닌 주권자인 평범한 지역주민의 시각에서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확장할 수 있다. 국가권력자의 결단으로 경제활동 터전과 몸 누일 쉼터를 잃어야 한다면 그건 국가폭력이다.
책에서 고영조 시인은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귀현리 출신 중 이주단지에 정을 붙이지 못하다 정신질환을 얻어 결국 스스로 삶을 뜬 친구가 있다”고 털어놨다. 그는 “쫓겨나서 도시의 골목에 오줌을 갈기면서/ 개새끼 개새끼 하며/ 고래고래 고함치던 그는/ 쇠를 만지는 기능공도 되지 못하고/ 동전을 세는 구멍가게 주인도 되지 못하고/ 개구리 오줌 같은 보상금으로/ 날마다 술만 퍼 마시는/ 주정뱅이가 되었다”라는 시 ‘주정뱅이’를 썼다.
산단을 만들겠다며 원주민을 쫓아내며 이주 택지를 지정했지만 원주민들 상당수는 택지 분양비와 건축비를 감당하지 못해 이주택지로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못했다. 현재 사파동의 일부인 사파정에는 1983년 전답 일부가 수용되고 1985년부터 마을의 수용과 보상·철거가 진행됐는데 이 기간 동안 사파정은 치안의 공백으로 우범지역이 됐다. 창원에서 태어난 동화작가 도희주는 이 당시 폭력과 범죄와 같은 괴로운 경험을 증언했다.
서울중심사(史)에서 벗어나는 지역사(史)
‘박정희 경제발전 신화’에 대항하는 담론으로 흔히 구로공단이나 청계천 노동자들의 노력과 희생이 등장한다. 서울 주요 대학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구로공단 노동운동의 경험을 통해 정치권에 진출했고, 노동운동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에서 활동하다 청계천 앞에서 분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한 노동자들이 서울에만 있었을 리 없다. 지역신문이 ‘지역’의 이야기를 남겨야 대한민국 역사가 서울의 역사로 축소되지 않는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흔히 1987년 1월 서울대학생 박종철의 사망과 같은해 6월 연세대학생 이한열의 죽음으로 시작한 대통령직선제 쟁취로 기록된다. 하지만 1985년 총선에서 독재정권에 대한 불만은 대통령직선제를 공약으로 내건 신민당을 제1야당 자리에 올려놓은 시민들의 선택으로 확인됐고, 군부와 시민들 사이에서 눈치보던 신민당에 대한 비판은 1986년 5월3일 ‘인천5·3민주항쟁’으로 나타났다.
6·10민주항쟁의 시작을 ‘인천5·3민주항쟁’으로 기억하는 일이 인천 지역언론의 몫이듯, 창원 산단을 조성하고 여기서 자신의 젊음을 경제성장으로 바꿔낸 노동자들의 발자취는 창원 지역언론의 몫이다. 저자들은 ‘들어가는 말’에서 “공단 건설 과정에서 이주하게 된 원주민 1세대들의 기억을 채록할 수 있는 시기는 얼마 남지 않아 더 늦기 전에 기록을 시작해야 했다”며 “공단 건설에 젊음을 바친 옛 기능공 중 많은 이들이 ‘창원사람’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다행이었다”고 했다.
창원에 뿌리내린 창원 사람들
책에선 전국 곳곳의 기계공고 졸업생이 창원으로 몰려와 일했고 일부 노동자들은 주경야독으로 야간대학에 진학한 이야기, 창원 최초의 대규모 공동주택단지인 반송아파트에서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사람 냄새 풍기는 공장 노동자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공장 밖 일상에 대해서도 다뤘다.
“창원공단이 들어선 이후 창원은 ‘남성 노동자’ 마산은 ‘여성 노동자’라는 구도가 성립됐다. 1960~70년대 마산 양덕동 한일합섬과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이미 여성 노동자가 많았고 창원에는 갓 성인이 된 남성 기능공들이 몰려들었기 떄문이다. 김규동 시인은 수출자유지역 후문 분식집 아주머니가 자주 양쪽을 연결해줬다고 했다.”(221쪽)
마산 양덕동 중국집, 수출자유지역 후문 통닭집, 산호동 육교 옆 생맥주 골목, 남성동 부둣가(마산어시장 인근)에 형성된 횟집거리인 일명 ‘홍콩빠’ 등에 대한 이야기, 젊은이들이 모여 일일 찻집을 운영해 그 수익으로 양로원 등 사회복지시설에 기부하고 그 안에서 연애까지 했다는 이야기 등도 생생한 지역사(史)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7월부터 시작한 ‘창원공단의 기억’ 연재기사는 MBC 경남의 <어른 김장하> 등과 함께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뽑은 2022년 하반기 좋은 보도로 뽑혔다. 경남민언련은 “공단이 들어서기 전 원주민 삶의 현장을 밝혀 잊힌 원주민 기억을 되살렸고 창원산단 조성 과정에서 원주민이 겪은 상처도 담아냈다”며 “농사를 짓고 살던 원주민이 반강제로 이주하면서 겪은 실향 아픔과 전국에서 창원공단으로 모인 이주민 삶을 추적, 실감나게 다뤄 지역 역사를 잘 서술한 사료로 가치도 뛰어나다”라고 평가했다.
책에는 창원의 과거 사진자료를 풍성하게 담았고, 산단이 생기며 사라진 마을을 기억하는 62개의 유허비의 사진과 관련 설명을 함께 실었다. 유허비는 과거 자취가 남아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고 후세에 알리기 위해 만든 기념비를 말한다. <창원 공단의 기억>이 창원 지역을 조금 더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이해하면서,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이 최고권력자의 결단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창원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물로 기억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ad_2]